- 서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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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둥근 것을 원으로, 각진 것을 사각형이라 부른다. 형태의 유비를 통해 닮음 과 차이를 구별해내고 사물의 부피를 가늠하는 일, 그 분류의 체계 안에서 우리는 자신 의 좌표를 발견하곤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저마다의 고유한 두께와 밀도를 지니기에 손 쉽게 묶이지 않는다. 설혹, 분류를 통해 각자의 자리가 자명해질지라도 하나의 이름으 로는 담기지 않는 각자의 결이 있다. 이 글은 그 결을 중심으로, 공통과 차이를 살피고 자 한다. 갤러리 0도씨 전시《미대졸전 after》에 모인 여덟 명의 작가는 각기 다른 시 공간의 여정을 지나왔으나, 그 사이에는 어딘가 닿아 있는 지점이 있다. 바로 ‘사회’라는 거대한 구조와 그 안에 부대껴있는 개인의 ‘특이성’(singularity) 이다. 그렇다면, 개별 적 존재는 세계 안에서 어떻게 제 무늬를 새기고 있으며, 현시점에서 이를 논의하는 일 은 왜 그토록 절실한가.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한 출발점으로서, 문희주의 작업을 살펴보 는 일은 유효한 접근이 될 것이다.
문희주의 작품 (2025), (2024), <투영된 고독 2>(2023)는 표면적으로 볼 때, 생선의 몸에 인간의 신체 부분을 이양하여 혼종된 ‘체’(體)를 표현한 그림이다. 그 체는 친숙하지 않은 기이한 모습으로 서, 익히 알고있는 ‘인간’이나 ‘생선’과는 확연히 다른 종류의 것이지만, 생선의 몸을 중 심에 두고 그 주체적 성격을 시각화하는 방식을 회화적 구성의 주요 원리로 삼는 점에 서, 몸체의 위치가 물속이며, 그가 물 안에서 살아가는 인격체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 나 작품의 제목과 형식을 고려해 본다면, 그는 미적 대상이기보다는 복합적인 조건 위에 착근한 존재 상태에 가깝다고 볼 수 있는데 이러한 해석이 가능한 이유는 매체를 매 개형식으로 구체화하여 공유하는 작가의 접근 방식에 있다. 이를테면, 작품의 주요 특 징인 ‘원’과 ‘사각’ 형태의 캔버스 틀은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시공간의 경계이자 ’인식’ 과 ‘대상’사이의 낯선 관계를 조응하는 핵심 장치로 기능한다. 이는 역사적 조형의식에 근간을 둔 그것의 미학적 속성과는 구분되는 인자로 동시대 예술의 수행적 특징이기도 하다. 그의 작업에 나타난, 어류-인간의 새로운 종과 존재방식을 들여다보기 위해 먼저 최근 작품인 (2025)을 볼 필요가 있다.
물속을 굽어 헤엄치는 물고기들과 정교하게 묘사된 비늘의 결은 마치 수면 위에 방향을 만드는 존재의 파동과 같아 그림에 새겨진 선들의 일렁임은 존재의 생기를 증명 하는 자연을 환기한다. 운동적 감각이 자연의 질서와 조응하며 일체를 이루는 지점에 서,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인 우리의 감각 지각은 생동이 일으키는 강도에 직면하여 자신의 내적인 비전을 형성하는 정동적 작용의 단계로 진입하게 되는데, 이때, ‘나’의 시 선과 수중의 대상이 안팎으로 교직되면서, ‘나’와 타자 간의 경계너머를 횡단하게 되고, 이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깊이 연루되어 있는지를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머지않아 풍경이 호명하는 실체가 결국 우리 자신의 실존을 증명하는 두 눈임을, 즉 ’동공’에 관한 존재론적 은유임을 직감하게 된다. 이로 인해 부상하는 것은 다름 아닌 ‘봄’(vision)의 문제이다. ‘봄’이란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 결코 분리될 수 없음 을 뜻하며, 더 나아가 양자가 상호 침투하며 형성하는 ‘세계의 살’(flesh of the world)을 가리킨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원형의 캔버스는 앞서 언급한 ‘봄’의 행위를 가능케 하는 매개체로, 그 안의 물고기는 더 이상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적 틀로 분할되지 않는 존재 그 자체의 자기성(selfhood)을 의미한다.
문희주가 최근 작업을 통해 드러난 이러한 문제의식은 이전 작업을 새로운 방식으로 재독해하도록 요구한다. 프레임을 매개로 대상과 관람자의 감각기관 사이의 거리 를 조정하며 ‘봄’의 문제를 보다 안정적으로 정위(定位)시키는 이러한 구성은 과거 작업 에서 기이한 신체를 정면에 내세우거나 개별 컷으로 파편화해 병치하던 방식 위에서 이해될 수 있다.
어류의 유선형 몸체 위에 이식된 인간의 눈을 표현한 <투영된 고독 2> (2023)과 각각의 신체로 분절된 시각적 브리콜라주 (2014)는 거리를 둔 관조나 상호 침투의 사유를 허용하기보다, 감각의 심부를 파고드는 촉매제이자 하나의 사건으로, 목격자의 안구(眼球) 그 예민하면서도 취약한 물리적 점막에 직접적으 로 침투하는 것이 특징이다.
통증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당착하는 것은, 어째서 우리는 단지 응시하는 것 만으로 이토록 고통을 앓게 되는가라는 물음일테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기어이 보도 록 강제하는 그 환경 속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아마 이미지 속 피조물과 나 사이 에 자리한 지독한 동질감, 결코 온전한 형태로 존재하지 못하는 불안 속에서 기어이 나의 위치를 발견하고야 마는 현실의 어려움과도 닮아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일련의 설 정들 속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핵심은, 왜 기이한 모습의 혼종체인가라는 질문이 아니 라, 그 이미지가 어떻게 주체의 방어기제를 무너뜨리고 통증을 자각하게 하는가에 있 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한 사유를 구체화하는 핵심적 계기로서 문희주가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수조’이다.
작가에게 수조는 존재를 규정하는 거대한 현실 체계 그 자체이며, 그 안의 물고기 는 그 체계 속에 배치된 존재를 상징한다. 그리고 문희주가 그 장면을 통해 목도한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위치였다. 체계에 의한 강제적 자리 배분은 비단 어류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인간 또한 예외가 아니다. 예컨대 성, 인종, 계급은 개인의 자유 의지와 무관하게 주어지는 질서로서,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의 정체성은 이를 기점으로 식별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논리에 따라 특정한 자리에 배치되어 제 몫을 수행하도록 요구 받는, 축소된 잠정적 존재로서의 숙명을 짊어진다. 이와 같이, 프레임이면서 동시에 프 레임이 아니고, 경계이면서 동시에 경계가 아닌, ‘나’와 ‘타자’의 감각이 긴밀히 얽히는 이 이중의 자리에서 대상은 ‘주체’도 ‘객체’도 아닌 ‘비체’(abject)일 수 밖에 없다. 그렇 기에, 우리는 이 대목에서, ‘인간’ -‘비인간’의 혼종화를 통한 자기 정체화 과정에 대해 서, 그 양태가 지금-여기의 현실에 가하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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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안감과 겉감처럼, 각각 다른 생의 단면을 보면서도, 맞닿아 있음을 아는 이가 또 있다. 황로이가 그렇다. 황로이의 작품을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말은 아무래도 그 림 제목이 그러하듯 소녀일 것이다. 눈여겨볼만한 점은 작품에서 소녀가 등장하는 방 식이다. <두 소녀>(2025), <백조 위 소녀>(2025), <토끼 위 소녀>(2025)의 제목이 암시 하듯이, 인물은 개인으로 존재하기 보다는 ‘쌍’(double)을 이루는 존재로 각각의 화폭 에는 ‘소녀’와 ‘소녀’, ‘소녀’와 ‘백조’, ‘소녀’와 ‘토끼’가 등장한다. 소녀와 생명체들의 풍 경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이 그림에서 흥미로운 점은 동일성의 원리가 관철된다는 점이 다. 이를테면 좌/우, 상/하의 방향으로 나란히 배치된 자리에서 한 쪽이 정면을 응시할 때, 다른 한 쪽은 상대와 동일하지 않은 방향을 바라본다. 재밌는 것은 이 같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명도와 채도가 균질하게 처리되어 있어 이들은 대립항이라기보다 오히려 동 일한 항으로 지각된다.
같은 시공간에 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저마다의 세계를 응시하는 사실 이, 그렇기에 서로를 잘 안다는 말이 실은 얇은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진실이, 그럼에 도 불구하고 개인의 내밀한 삶이란, 그 모든 믿음의 행위에 있음을 아는 것이 그림에서 더 생각해볼 수 있는 지점일 것이다. 이를 염두해두고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읽어보면, 두 인물이 서로를 내어주고 있다는 점에서, 이 둘은 ‘나’와 ‘너’의 관계를 의미하기 보다는 ‘나’를 구성하는 ‘안’과 ‘밖’의 요소로도 읽혀진다.
‘소녀’의 시점에 ‘나’를 대입해보면, 소녀는 나와 같은 외양을 한 소녀와 백조 그리 고 토끼와 조우하여, 그들과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함께 공명하고 있다. 소녀의 입장에 비추어보면, 이는 현실과는 다소 동떨어진 낯선 풍경이자, 현실의 언어로 설명 불가한 오묘한 현상으로, 소녀가 동화 같은 비현실의 시공간을 경유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 현실이란, 현실에 서 있지 못하는 연약하고 불안정한 요소들이 자라는 취약한 장소로 그것은 남근의 언어인 ‘팔루스’(phallus)로 포획될 수 없는 비이성의 장소이자 그렇기에 자신을 옭아매는 옷의 벗겨냄이 가능한 근절의 땅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림 속 소녀와 그에 대응하는 쌍이 자아내는 정적인 이미지는 고정된 상으로 타자를 대상화 해온 ‘팔루스’의 언어가 침투할 수 없는 저편의 지점에서, 자기 접촉을 통해 다원적 자아 를 끊임없이 생성해내는 자력의 장소로 해석하기에 충분하다. 그렇기에 작품 속 소녀 의 ‘쌍’인 다른 소녀, 하얀 백조, 분홍 토끼는 고정된 개별적 실체가 아니라 소녀 자신의 변주를 비추는 거울로서, 끊임없이 분화하며 매 순간 새로운 얼굴을 획득하는 생명력 으로서의 정동이며, 나아가 인식 이전의 직관과도 같은 것이다. 이는 엄밀한 과학이 만들어낸 참된 보편타당성의 영역으로부터 벗어나 정신의 자발성에 근거해 자유의 가능 성을 노정한다는 점에서 관념의 외부로 향하는 통로를 제시한다.
레지나 안의 작품에서는 이전 회화에 비해 형상의 마디가 과감히 변주된다. 그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그로테스크’이다. 레지나 안은 <천지창조의 순간> (2025), <치석과 치아들>(2025), <육포리자>(2025)에서 각각 다른 비극의 성질을 안고 있는 음 울한 초상, 이를테면 ‘반문명화된 원시 종(uncivilized primitive race)과 붉은 피에 묻힌 신원 미상체’, ‘진주 목걸이를 걸친 여인의 사진과 과장 노출된 치아 구조’, ‘액자의 평면 을 벗어나 부조 조형이 된 여인의 얼굴(모나리자를 모티프로 한다는 점에서)과 상흔’을 주요 이미지로 내세웠다. 생의 온기가 지워진, 죽음에의 전조가 깃든 이 몽타주들에서 야만성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러한 회화적 표현으로 레지나 안이 빈번하게 언급하는 것은 전통적인 미의 개념에 깃들어 있는 근대성(modernity)이라는 망령이다. 비율과 비례의 질서는 정합성을 명분으로 기준에서 이탈한 형태들을 경계 밖으로 추방 하는 권력의 문법으로 작동해왔다.
생경하게 꿈틀거리는 저마다의 생을 정형화된 틀에 가두고, 균일한 크기와 모양 으로 납작하게 찍어 눌러온 이 동일성의 논리는 오로지 틀에 부합하는 형태만을 정상으 로 승인하며 그 바깥에서 태동하는 형상들을 무참히 지워왔다. 레지나 안에게 있어, 붕 어빵을 찍어내듯 개인의 특이성(singularity)을 거세해온 미의 원리와 그에 따른 근대화 는 가령, 역사를 관통해온 그간의 비판과 성찰, 지식과 투쟁으로 그것의 부당함을 부분 적으로 극복했을지언정, 여전히 오늘날의 사회적 준거 안에서 유효한 기제로 작동하 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다. 그리하여, 레지나 안의 회화에서 포착되는 형태의 탈구 와 그로부터 기인하는 거친 야생적 감각은, 사물을 명확한 개념적 틀 안에 가두고 위계 화하려는 근대적 이성주의에 대한 항거에 가깝다. 이처럼 형태를 해체하고 야생적 에 너지를 가감 없이 드러내는 행위는, 대상에 부여된 기성 관념의 외피를 박리하여 그 이 면에 잠재된 비이성적 활력과 원초적 생명력을 회복하는 실천적 과정이다.
그러나, 대상을 뒤틀거나 파괴하기 위한 목적으로 표현했다고하면 큰일이다. 그는 ‘도치’(inversion)했다. 이 도치라 함은 친숙한 도상을 탈구의 대상으로 가져오되, 가 치 전도를 통해 그에 담긴 수사학적 개념과 맥락을 뭉개는 행위를 뜻하며, 이는 조각상, 명화, 귀걸이, 신화 등 기표가 지닌 ‘성스러운 것’과 그와 대비되는 원시, 피, 치석, 부조
조형에 투사된 ‘야만적인 것' 간의 조형적 합치에서 확인된다. 그로 말미암아, ‘성 스러운 것'이 점유해온 숭고함과 불가침성은 그것이 거부해온 다른 요소로의 전용(轉 用)을 통해 조소의 대상으로 무력화되고, 이로 인해 기존의 관념적 권위는 파기된다.이 처럼, ‘미’의 영역에 관여하는 레지나 안의 면모는 수행적 특징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그 의 회화는 그래피티의 속성과 닮아 있다. 작가가 캔버스 위에 붓질을 거듭하는 장면을 복기해보면, 그의 회화에서 형상과 평면의 관계는 캔버스의 물리적 규격 안에서 사고 하는 방식에 있기보다는, 예술가가 스스로를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로 인식하 고 실존을 억압하는 부조리에 맞서 개별 주체의 고유한 음성을 타전하려는 저항의 제스 쳐에 의해서 구체화된다. 이는 “이상적인 인간상과 물리적 부패 사이의 간극“ 을 강조 하는 작가의 말이 뒷받침하듯이, 레지나 안이 ‘미’의 전통적 개념과 그 근저의 유사한 정 의들이 만들어낸 기준을 의문시하고, 의미의 전환을 꾀하면서, 기성의 관념적 틀을 재 규정하려는 새로운 전개와 의미 창출에의 욕망에 있기 때문이다.
기성의 관념이 탈각된 형해화의 자리에서, 우리는 비로소 개별적 주체의 삶을 끊 임없이 잠식해온 사회적 기제의 민낯과 대면하게 된다. 우리가 자명한 질서로 받아들 이며 내면화해온 미학적 관습은, 실상 개인의 특이성을 규격화하고 거세해 온 것은 아니었는가. 이제 우리는 그 몸짓이 남긴 잔향을 묵묵히 이어받아, 지배적인 억압에 맞서 자기 정의를 확립하려는 또 다른 수행적 시선으로 이행하고자 한다. 레지나 안이 의미 변용을 통해 사회적 변혁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면, 이예은은 사회가 개인에게 남긴 은 밀한 상처를 집요하게 응시하며, 이를 공적 영역인 캔버스 위에 각인해 나간다. 이예은 의 그림에는 서브컬쳐(subculture)의 요소들이 빈번히 출현한다. 원색의 헤어와 콘택트 렌즈를 착용한 인물과 그의 상반신에는 ‘별표’, ‘컵케이크’, ‘아이스크림’, ‘엑스표’ 등의 문양이 곳곳에 덧붙여 있으며, 다소 과장되고 장난스러운 연출로 인해 화폭 전반에는 키치(kitsch)적인 경향의 분위기가 맴돌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예은이 서브컬쳐를 통한 키치적 표현을 추구하면서, 제목에‘머 그샷’ (mugshot)을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제목인 ‘머그샷’ 은 ‘얼굴’을 의미하는 비 속어인 ‘머그' (mug)와 촬영을 뜻하는 ‘샷' (shot)을 합친 은어로, 경찰이 피의자를 체포 한 후 얼굴을 식별하기 위해 촬영하는 ‘경찰 사진’ (police photograph)을 가리킨다.
만약 작품에서 인물이 어떠한 사회적 낙인의 대상으로 분류된다면, 인물의 외양 이 환기하는 익살스러운 분위기가 가벼운 묘사는 아니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예은의 작품이 설령 미적 유희를 내포할지라도, 내밀한 자화상이 아니고 공적인 사회적 초상이라는 점을 고려해, 실재와의 관계로 읽을 해석학적 렌즈가 마련돼야 하며, 그 서브컬 쳐적 요소를 독특한 장식으로 간주하기 보다는 알레고리의 형식으로 분석할 필요가 있 다. 이에, 인물은 개인의 개성을 표현하는 팝적인 도상으로서 읽히기 보다는 문화적 부 호들이 빚어내는 어떤 무늬의 형태로 이해허고 그 궤적을 쫓는 방식의 접근이 요청된다.
이를 기억하며, <머그샷 A>(2025)와 <머그샷 B>(2025)로 돌아가보자. 본 인물의 초상이 개별 주체의 식별을 전제로 한다면, 우리는 신원을 특정하는 결정적 기제인 미 세한 디테일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인물 위에 부착된 문양을 서브컬처적 요소에 비유했으나, 제목과 인물 간의 관계를 고려할 때 그 표면은 특정 정보를 내재한 기표에 가깝다. 때문에 문양은 개별자의 특이성을 입증하는 신원의 모티프이자, 개인 서사를 함축한 매개체로 기능한다. 그리고 문양이 신원의 표지로 작동한다면, 그 개인을 전체 로부터 식별해내기 위해 호출되어야할 것은 결국 그 문양에 관한 작가 개인의 이야기 일 것이다.
작가의 설명에 따르면, 피어싱이나 핀과 같은 문양들은 중의적인 함의를 지닌다. 작가에게 있어서, 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미적으로 수식하려는 도구인 동시에, 차마 내 보이지 못하는 내면으로, 이러한 이중적 욕망은 인간이 타자와의 관계망 속에서 형성 되는 존재라는 점에 기인한다. 즉, ‘사회적 위치로서의 나’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끊임 없이 갱신되어야만 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표식들은 우리 삶에 부여된 직업이나 장소 처럼, 개인의 삶을 압도하여 정해진 공간 밖으로의 탈주를 가로막는 조건들을 포괄한 다. 주체가 특정한 방식으로만 실존하도록 규정하는 문제와 관련해. 클레르 마랭 (Claire Marin)은 캐롤 길리건(Carol Gilligan)의 논의를 소환한 바가 있다. 사회적 관계 망에 편입되는 순간, 개인은 본연의 목소리가 아닌 타자화된 음성을 습득하며 억양과 톤, 발화의 강도까지 미세하게 조정하게 된다. 마랭에 따르면 이러한 순응은 주체가 자 기 자신과 맺는 본래적 관계에 균열을 일으킨다. 따라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자신 을 구속하는 삶의 조건과 공간의 표식들을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 마랭의 통찰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화폭 속 인물의 과장된 표정은 사회에 의해 축소된 존재를 회복 하려는 처절한 몸부림으로 읽힌다. 이는 안면 근육에 고착된 사회적 규범의 표식들에 저항하며, 억눌린 자아의 장소를 되찾으려는 열망의 제스처다. 사회의 암묵적 질서가 강요하는 보기 좋은 미소나 무채색의 중립적인 신호와는 궤를 달리하는 이 일그러뜨리 는 표정들이야말로, 나를 세상으로부터 구별 짓는 유일하고도 고유한 실존의 징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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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체와 객체 사이를 가르는 분할과 위계의 구조를 길어 올려내어 그것을 감응적 관계로 사유하도록 촉구하는 문희주와 황로이의 인식을 지나, 현실 구조에 의해 객체 화된 개인의 내밀한 조건과 그 예속된 자아상에 정주하지 않은 채 바깥에서의 또 다른 현실 공간을 만들어내는 레지나 안과 이예은의 의식적 실천을 경유하면서, 우리는 비 로소 현실의 확장이라 부를 수 있는 ‘이후’의 시공간에 도달하게 된다. 그 ‘이후’라 함은 자기 갱신의 역량을 통해 내부의 모순을 봉합하여 완결된 자기로 회귀하거나 지금-여 기의 현실로부터 탈주해 거쳐온 행로를 기념하는 낙관적인 전망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 다. 역설적이게도, 자리에 도사리고 있는 것은 자기 동일성으로 수렴된 자기로서의 현 존이 아닌, 현실에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을 통과하면서 실체를 얻은 몸들의 풍경이다. 김채원의 작품 <희망은 조각해볼 수도 있어>(2025),<욕망의 형태>(2025),<감정의 원 천>(2025)에서의 ‘조각’ ‘형태’ ‘원천’의 수사가 암시하듯이, 김채원의 회화에서는 각각 의 인물이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기보다는 행위소(actant)의 형태로 묘사되고 있다. 소 위, 통상적인 분류 체계에 기대어 ‘인간’과 ‘비인간’ 양자를 구분하는 시도는 김채윤의 세계에서 설득력을 갖지 않는다. 이를테면, <희망은 조각해볼 수도 있어>(2025)에서 식물은 그 자신의 고유한 뿌리로 물과 햇빛을 머금으며 생장하는 토양의 자연물로 묘사 되지 않는다. 대신 넝쿨을 따라 자신의 첨예한 존재 형상을 확장해 가며 생의 약동(élanvital)에 호응하는 에너지의 형태로 제시된다. 오브제와 과일, 물고기 등 서로 다른 존재 자들이 함께 얽혀 증식하며, 혼성적 배치의 상태를 이룬다.
이러한 상태는 넝쿨의 조직에 국한되지 않고, 나뭇가지의 맥으로까지 전이되며 유사한 풍경을 반복한다. <욕망의 형태>(2025)에서 여섯 명의 인간(살색의 육체라는 점에서)은 마치 여섯 개의 빨래집게처럼 나뭇가지에 매달린 채 꺾인 자세로 널부러져 있으며, 그 꺾여진 몸 옆으로 과일과 동물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 그림에서 유일하게 땅 위에 서 있는 인간은, 언제든 추락할 듯 위태롭게 놓인 이들을 받아내기 위해 두 팔을 치 켜들고 있다.“희망은 조각해볼 수도 있다”는 앞전의 풍경과는 다르게, 이 그림이 보여주 는 기울어진 풍경의 이미지들은 어떠한 희망도 미래도 품지 않은 최후의 시간을 연상시 킨다. 그러나, 이 이미지는 단순히 폐허 만을 상징하지 않는데 그것의 근거로는 김채윤 의 그림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달걀’과 ‘달걀프라이’에 있다. 주지하다시피, 달걀은 닭의 알이다. 닭은 알을 매일같이 생산해내는 데 이러한 닭의 번식 능력은 달걀을 보다 더 자주 소비하고자하는 인간의 욕망에 의해 개량된 결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닭의 위치를 상기해보면, 그들은 부화하기도 전에 달걀로 소비된다는 점에서 본연의 존재성 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설령 볏을 세운 닭이 되었다 한들, 가두리의 폐쇄된 장 안에서 살아가며 끝내 도축되는 기이한 생의 굴레를 반복할 뿐이다. 이와 같은 실존적 제약은 비 단 닭에게만 국한되지 않는 모든 가축의 처지를 포함하며, 이 지점에서 그들의 '세계 내 존재(In-der-Welt-sein)'로서의 의미는 의문에 봉착한다.
이를 고려하자면, 오로지 인간의 소비를 위해 생을 부여받은 듯한 그들의 이중적 숙명을 이미지로 구체화하는 방식 예컨대, 달걀을 파열시키는 인간의 손과 은식기 곁 에서 납작하게 식어가는 달걀프라이의 묘사는 인간중심주의에 비판적 관점을 투사하 는 미적 장치로 볼 수 있다. 깨진 껍질과 흘러내린 노른자, 그것을 소비하기 위해 놓인 식기와 인간의 육체가 나무의 순환 구조 속에 서로 얽히며 하나의 생태적 감각으로 응 축된다. 주목할만한 점은 이러한 뒤섞임의 지점에서, 타자를 도구로 규정하고 향유해 온 인간의 주권적 위치에 균열이 선연하게 그어지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그림을 유심 히 보면, 인간의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조류의 머리가 들어앉아 있음을 목도하게 된 다. 이는 인간의 처지가 이미 고유한 개별성을 상실한 채, 거대한 생산과 소비의 회로 속 에서 언제든 대체 가능한 익명의 단백질 덩어리로 전락했음을 고발하는 서늘한 환유 다. 타자를 착취하기 위해 정교하게 설계된 도구적 이성의 시스템은, 역설적으로 그 시스템의 설계자인 인간마저도 '닭'의 운명과 다를 바 없는 부품으로 격리시킨다. 인간의 눈이 머물러야 할 자리에 자리한 조류의 시선은, 우리가 타자에게 가했던 그 비정한 소 외와 대상화가 결국 부메랑처럼 돌아와 우리 자신의 얼굴마저 지워버렸음을 증명하는 가련한 자화상인 것이다.
<감정의 원천>(2025)은 견고했던 인간중심주의의 성벽이 무너진 이후, 그 폐허 위에 비로소 자리 잡은 인간과 비인간의 수평적 풍경을 그려낸다. 화면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물줄기는 단절되었던 생명의 맥락을 다시 이어주고, 어두운 푸른빛에서 황금빛 으로 번져가는 하늘의 그라데이션은 소외된 존재들이 맞이하는 ‘회복의 서광’을 암시한 다. 하늘 위에서 축제처럼 터지는 불꽃은 더 이상 인간만의 전유물이었던 승전보가 아 니다. 이는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적 폭력이 종언을 고하고, 모든 생명체가 각자의 고 유한 진동으로 조응하는 ‘공생의 제의’에 가깝다. 이처럼 파기된 자리에 물과 빛의 변주 는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를 도구화하지 않고 하나의 생태적 운명 공동체로 결속되는 비 정형의 연대를 암시한다. 그리하여 이 풍경은 가련한 자화상을 넘어, 인간이 비인간 타 자와 어떻게 공명할 수 있는지를 드러내는 거대한 공생의 파노라마로 확장된다.
객체와 객체 간의 수평적 연결로 세상을 읽어내는 감각은 비단 김채윤에게만 국 한된 것이 아니다. 김채윤이 인간중심주의라는 외피를 뚫고 들어가 인간과 비인간이 본디 공유해 온 세계의 근원적 뿌리를 현상해 보인다면, 이해나의 작업은 종의 경계가 희미해진 포스트휴먼의 풍경 속에서 이질적인 존재들이 스스로를 결합하며 자생하는 행위 능력에 주목한다. 전자가 모든 존재를 하나의 평평한 장(場) 위에 놓음으로써 연대 의 가능성을 사유한다면, 후자는 그 장 위에서 예기치 않게 돌출되는 기이하고도 생경 한 변이체들의 생태계를 구축해 나가는 셈이다.
이해나의 작업은 종만들기를 방법론으로 삼아 대안적 생태계를 구축하는 방식으 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가 창조한 신인류 호모 플리칸스(Homo Plicans)는 라틴어 ‘Plicāre’인 접음, 겹침 등 어원을 둔 개념으로, 그야말로 스스로 분화하고, 그 분화의 힘 을 긍정하는 이접의 운동 속에서 형상화되는 인간의 유형을 의미한다. 21세기 초 서울 에 출현한 ‘호모 플리칸스’의 등장이라는 가설로부터 시작하여, 이 종이 점차 우세종으 로 자리 잡아가는 설정이다. 작품 <바른 자세 3>에서는 새로운 인간 종, 호모 플리칸스 의 출현이 본격화된다. 하나의 얼굴 아래 접혀 결합된 두 개의 몸은 단일한 형상을 이루 고, 팔과 다리는 마치 접착제에 눌러붙은 종이처럼 서로 얽히며 기묘한 유기성을 구성 한다.
작가가 통상적 인간상에서 이탈한 이합의 몸에 ‘바른 자세’로 명명한 것은, 그것을 낯섦의 차원으로 환원하기보다 잠재성을 현실로 분기시키는 종 특유의 능력으로 재규 정하고, 그것에 위상을 부여함으로써 존재를 정당화하려는 전략으로 읽힌다.
과정이 종결되지 않은 채, 어떤 접힘과 중첩의 상태로 지속되는 것이 새로운 유기 체의 특성이라면, 그 위에 걸쳐 있는 입체 역시 그러한 연장선 위에서 함께 사유될 필요가 있다. 이 형상은 앞선 이미지와 달리, 고양이와 닮은 비인간을 연상 케하지만, 동시에 ‘호모 플리칸스’라는 직접적인 명명 행위를 통해 그 존재를 다시금 인 간의 계보 속으로 끌어들인다. 이는 호모 플리칸스의 생물학적 범주가 과연 무엇인지 에 관해 의미를 되묻게 만든다. 때문에, 이 작업이 지향하는 바는 새로운 종의 발명을 통 한 미래 투사적 상상보다는, 분기·접힘·얽힘의 장 내부에서 존재의 잠재성을 사유하고 그를 토대로 인류세와 그 개념이 포괄하는, ‘생태’, ‘환경’, ‘생명’의 동시대적 문제를 보다 명민하게 포착하기 위해 인식적 해상도를 높이는 것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해나의 작업이 강조하는 '접힘'은 질 들뢰즈(Gilles Deleuze)가 주창한 '주름(le pli)'의 개 념으로 치환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아주 긴 하나의 비단 천을 상상해 보자. 천을 구기면튀어나온 산과 들어간 골이 생긴다. ‘나’와 '너', '안'과 '밖'은 사실 이 한 장의 천이 어떻게 접혔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 단일한 연속체에 다름 아니다. 즉, 독립된 별개의 실체가 아 니라 어떻게 접히느냐에 따라 발생하는 변양(variation)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이 들뢰 즈가 말한 주름이다. 이해나에게 이러한 인식은 매우 결정적인데, 이는 인간이라는 개 별 단위를 넘어 인간-기술-자연이 복잡하게 공존하는 '관계망’을 사유하게 하는 인식론 적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호모 플리칸스’는 단순히 상상 속에 머무는 가상의 존재가 아니며, 오히려‘테라폴리스’(terrapolis)에서의 거주를 가능하게 하는 실천적이 고 대안적인 인간상이다. 해러웨이가 제안한 이 공생의 장은 인간과 비인간이 서로의 운명에 '심포이에시스(Sympoiesis, 함께-만들기)'적으로 얽혀 있음을 전제한다. 이는 주체에게 끊임없는 '응답-능력(response-ability)'을 요구하며, 공통 세계의 구축 가능성 을 시사한다는 점에서 세계의 감수성을 읽어내는 해상력을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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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나이테와 같아서, 계절의 바람, 햇빛, 물, 불, 공기는 몸을 관통하지 않고 피부 에 고스란히 찍혀 지금-여기 우리의 살을 구성한다. 새롭게 돋은 살이 응축하고 있는 것 은 그러한 찍힘들이 응집된 ‘기억’이라는 내적 공간이다. 자신의 내밀함 속에 깃든 어떤 공간을 통해 우리는 슬픔과 기쁨, 설움과 환희를 느끼며, 억눌린 삶에 대해 헤아리며 살 아간다. 그래서 기억은 빛자국들의 은총이며, 지금-여기 ‘나’를 구성하는 삶의 도식이 다.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정희정과 조한비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기억’이기 때문이 다. ‘나’를 형성케 하는 빛의 질료인 기억을 외부로 실체화한다는 점에서, 두 작가의 작 품은 그 몸의 도식과 무관한 타자의 몸에 개인의 우주를 베어들게 하고는 그 안으로의 모험을 촉구하는 공통적인 특성을 가진다. 그러나, 개개인의 내적 공간이 다르듯이, 정 희정과 조한비가 기억을 사유하는 방식은 다르다. 그렇기에, 두 작가가 기억의 질료를 다루는 태도와 방식을 한 걸음 더 깊이 마주해볼 필요가 있다.
생의 배면에서 기억을 길어 올려 작업으로 숙고하는 과정에서, 두 작가가 공통적 으로 주목한 것은 바로 ‘장지’(壯紙)이다. 장한 종이의 약어인 ‘장지’는 그 이름의 연원 처럼, 씩씩하고 굳세어 쉽게 찢기지 않는 강한 종이로, 닥나무의 섬유질이 겹겹이 엉겨 붙어 두껍고 질긴 살성이 특징이다. 비유컨대, 그것의 살성은 ‘생’의 물질적 기표이기도 하다. 만일, 장지의 그 질기고도 묵묵한 물성이 생의 기저를 은유한다면, 그 물성을 온몸 으로 앓으며 사유하는 행위는 곧 존재의 숙명을 인식하는 일이며,결에 깊숙이 개입하 는 행위는 자신에 새겨진 빛 무늬를 더듬는 일과 같다.
이에, 정희정이 택한 방법은 ‘수비’(水飛)이다. 물 수(水)에 날 비(飛)자를 써서 ‘물 속에서 날아오른다’는 뜻을 지닌 수비는, 천연 광물이나 안료를 물에 풀어 입자의 크기 와 무게를 정제하는 채색 방식이다. 물의 부력을 거치며 불순물이 제거된 안료는 가장 순수한 상태에 도달하며, 화학적 변질이 적어 수 세기 동안 본연의 색을 잃지 않는 강건 한 미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 특징이다. 물 속에서 억겁의 시간을 견디며 제 몸을 깎아낸 수비의 입자들, 정희정에게 이 고운 가루들은 시간의 풍화를 거쳐 투명한 성질을 지닌 다는 점에서 무한을, 그 빛나는 투명성으로 인해 좀처럼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사실에 서 영원을, 그렇기에 특별한 삶을 상징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을 토대로, 정희정의 그림<찰나가 영원하기를>(2024), (2025), <여명미로>(2025)를 가만히 바라보면, 질료의 특성이 작품 전 체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핵심 기제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으로, 대상의 윤곽은 연기처럼 아스라이 흩어져 있으며, 배경과 주체의 구분이 없는 하나의 거대하고 정적인 전경이 일렁인다. 빗금이 처져 있어 외려 미심쩍은 저 너머의 세계를 응시했 을 때, 감각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정적인 푸름 사이로 번져가는 물방울의 낮은 숨소 리와 대기를 가르는 바람의 맥동과 같은 공감각적인 울림이다. 이와 같이 작품이 자아 내는 공감각적 특성은 ‘달’과 ‘산’, ‘숲’과 같은 자연을 시각적으로 응시하는 차원을 넘어, 그 푸름 속에 나의 존재가 온전히 스며드는 신체적 경험의 차원으로 탈바꿈함으로써, 마침내 영원이라는 심연으로 가닿게 하는 현상학적 통로로 기능한다.
정희정이 자신의 조형 언어를 보다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질료의 성격에 주 목했다면, 조한비는 질료적 상상력 그 자체에 주목하며 재료의 성질이 드러내는 우연 성, 가소성, 그리고 창발성의 차원을 탐색한다.
조한비의 작업에서 ‘아크릴 소프트 젤’을 층층이 쌓아 올리는 기법은 작품의 주요 한 특징이다. 특히 작가는 젤이 가진 특유의 응집과 번짐의 운동성에 주목한다. 작가는 손의 미세한 압력에 따라 변형되는 가소성 속에서 물질이 품고 있는 상상력의 깊이를 가늠하며, 불현듯, 여기에 ‘먹’이나 대비되는 색채를 혼합한다. 이 때 물질들은 충돌되 면서도 서로를 향해 스며들며, 스스로를 정의한다. 때문에, 둥글게 응집된 물질들은 조 한비에게 은밀하게 부풀어 오르는 시간의 흔적이자, 그 화학 작용으로 하여금 어떤 분 명한 세계를 만들어내는 끈질긴 생명력에 가깝다. 이러한 능동적인 성질은 작가로 하 여금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이미지들을 떠오르게 하며, 그 중에는 작가의 기억 속에 침전되어 있는 계절의 감각을 건져올려, 이를 열어젖히는 용매로 거듭난다.
평면의 회화에서 두툼한 형태로 돌출된 아크릴 젤은 작품 <꽃샘추위>(2025)에서 는 차가운 계절 속에서 잔뜩 응축된 꽃봉오리의 모습으로 <빙하>(2025)는 빙하 아래에 서 서서히 배어 나오는 푸른 물의 액체화된 상태로 나타난다.
이 때 계절은, 물질의 내부에서 천천히 형성되는 어떠한 종류의 리듬으로 은유된 다. 결국 그의 작업은 소프트 젤이 무한히 중첩되며 생성되는 연성적 물질 작용의 기억 이자, 이질적인 성질들이 서로 침투하며 하나의 형상을 꿈꾸는 장면에 가깝다. 그것은 과거의 어느 지층에 잠겨 있던 계절의 잔상이 물질을 매개로 다시 현재 속에서 호흡하 기 시작하는 태동과 같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이 설파했듯, ‘동시대인’이라는 것은 시대의 빛 에 눈멀지 않고 오히려 그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빛을 응시하는 자각의 상태, 즉 끊임 없는 태동의 과정에 놓이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문희주, 황로이, 레지나 안, 이예은, 김채윤, 이해나, 정희정, 조한 비 등 여덟 명의 작가가 보여준 수행성과 예술적 실천의 전략을 살펴보았다. 주체와 객 체 간의 위계적 관계를 해체하고 사유하는 문희주와 황로이, 대상의 일방적인 주체화 에 저항의 제스처를 취하는 레지나 안과 이예은, 객체와 객체의 설정을 통해 인간과 비 인간의 수평적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김채윤과 이해나, 그리고 이러한 모든 관계망 속 에서 실존적 자아의 의미를 발굴하려는 정희정과 조한비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각자의 언어를 통해 자신의 현재를 적확(的確)히 직시하며 동시대적 실천 을 이어가고 있다. 이들의 작업은 우리로 하여금 견고한 동시대적 장치(dispositif) 안 에서 이를 세속화(profanation)하는 문제, 그리고 우리가 어둠을 대면하는 태도에 관한 이정표를 제시한다. 나아가 이 항해는 ‘나’ 자신의 위치를 직시하고, 우리를 억압하는 관 계의 끈을 재배치함으로써 개인의 특이성을 공적 영역으로 발화한다. 이제 동시대인으 로서 묻는다. 우리는 이 어둠의 심연에서 각자의 특이성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 그 태 동의 몸짓이 이미 우리 앞에 길을 가리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