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민 평론 모음

전시감상 [김정환 작가 작품감상] 묵음(默吟)을 화폭에 담은 철학적 여정



김정환(b.1969) 작가의 묵음(默吟, Poetry with Silence) 연작은 현대미술에서 침묵과 명상의 미학을 탐구하는 독창적인 작업이다. '소리 없이 시를 읊다'는 뜻의 제목처럼, 그의 작품은 시각적 언어로 내면의 시를 표현하고 있다. 송나라의 시인이자 화가인 소동파의 ‘시중유화, 화중유시(詩中有畵 畵中有詩)’라는 말은 소동파가 당나라의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의 시와 그림을 감상하며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이는 시(詩)와 그림(畵)이 본질적으로 하나임을 뜻하는 동양적 예술관을 나타낸다. 왕유의 시가 한 폭의 그림을 연상하게 한다면, 김정환의 그림은 한 편의 시를 떠올리게 만든다.

묵음 연작은 여백과 틈, 시간성과 공간성을 시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화면 곳곳에 배치된 여백은 긴장과 호흡의 공간으로 작동하며, 그 안에는 말보다 더 깊은 언어가 머물고 있다. 작가는 묵음의 상태, 즉 소리 없는 집중의 흐름 속에서 작업이 태어난다고 말하며, '침묵(沈默)'을 조형적 동력으로 활용한다. 김정환의 작품이 주는 현대적 의미는 시끄러운 세상에서 침묵의 소중함을 재발견하게 하는 데 있다. 그는 침묵을 "단지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가슴속을 꽉 메운 그 생각들을 말로 표현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해석하며, 언어가 미처 담아내지 못한 사유의 전달을 시도한다.


작가는 유년기부터 익힌 서예의 전통을 바탕으로 현대회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한다. 서예적인 요소를 회화적으로 풀어내는 그의 화면은 검고 푸른 천연 안료가 한지를 세 번 덧댄 캔버스나 아사천에 스며들면서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번짐과 스밈을 통해 '기운생동(氣韻生動)'의 전통적 미학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다. 

이는 김환기 작가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김환기 작가는 뉴욕에서 유화로도 수묵화의 먹처럼 번짐 효과를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는 다양한 한지를 연구하고, 광목천 위에 아교를 칠하여 캔버스를 제작하고, 테라핀유를 섞은 유화 물감으로 점을 찍기 시작했다. 그러자 한지 위의 먹과 같은 번짐 효과가 나타났다. 이 번짐 효과를 활용하여 김환기 작가는 캔버스 위에 점을 하나씩 찍어나갔고, 그 결과 김환기 작가의 고유 특징인 '전면점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김정환 작가도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재료 연구를 꾸준히 했다. 캔버스에 한지를 3겹 씌우고 종이가 마른 후 팽창하면 북소리가 날 정도로 팽팽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위에 특정 브랜드의 천연 안료로 자연스러운 번짐을 만들고, 인공 규사토(인공 돌가루)를 통해 작가가 만족하는 색의 먹색을 구현한다. 작가는 다양한 재료와 실험 과정을 통해 지금의 '묵음' 연작을 완성했다.


작가는 중국 먹과 규사라는 물질적 요소를 한지에 결합해 독특한 질감과 깊이를 창조한다. 특히 주목할 점은 검은색에 대한 작가의 독특한 해석이다. 그에게 검은색은 단순한 어둠이 아닌 그윽하면서도 깊고 고요한 것의 상징이 된다. 이러한 검은색은 깊은 바다나 우주의 공간을 연상시키며, 감상자에게 명상적 경험을 제공한다. 특히 전시장의 조명에 반응하는 인공 규사토는 빛 반사로 반짝거리고, 침묵의 가치를 내재한 먹색은 그 빛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김정환 작가의 작품에서 검은색과 대비를 이루는 흰색은 단순한 여백이 아닌 '가능성의 공간'으로 기능한다. 흰색은 처음에는 숨을 쉴 수 있는 여백으로 존재하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만의 존재성을 드러내는 능동적 요소가 된다. 이러한 흑백의 상호작용은 음양의 조화, 무(無)와 유(有)의 변증법적 관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무지개의 색깔에서 존재하지 않은 흰색과 검은색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빛이 하나로 뭉쳐 있을 때는 흰색이 되며 빛이 사라져 없을 때는 검은색을 띤다. "색의 본질이 빛이라면 검은색은 색이 아니다."라는 가설은 맞다. 왜냐하면 태고 우주의 색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무극, 태극의 빛깔 그것은 검은색이다. 즉 있고 없고 유무에 따라 흰색이 되고 검은색이 되니 이것이 사유의 색깔로 전환된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같다.


작가의 작품을 감상하는 거리에 따라 다른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가까이서 보면 먹의 물성과 번짐의 디테일을, 멀리서 보면 전체적인 조형미와 정신적 울림을 느낄 수 있다. 김정환 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작품으로 완성되는 세 가지 기준을 갖고 있다고 한다. 첫째는 서예로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둘째는 단순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 조건은 생경한 이미지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작가가 그리는 100장 중 약 1~2장만 작품이 된다고 한다.

김정환의 묵음 연작은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물질과 정신을 아우르는 통섭적 사유의 결과물로서, 현대미술에서 침묵의 미학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은 단순히 시각적 아름다움을 넘어서 관람자에게 내면적 성찰과 명상의 기회를 제공하는, 진정한 의미의 정신적 예술로 평가받고 있다.

흥미롭게도 김정환 작가는 화가로 활동하기 이전에 대우증권에서 애널리스트로 25년 가까이 근무했고, 투자자문사를 설립해 경영하기도 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학부 전공이 경영학인데 석사 학위는 회화와 미술교육이다. 또한 서예 평론가로도 활동하며 <샐러리맨 아트 컬렉터>, <어쩌다 컬렉터>와 같은 저서를 통해 일반인들의 미술품 수집에 대한 실용적 조언을 제공하기도 했다. 이러한 다면적 활동은 그의 작품에 이론적 깊이와 현실적 감각을 동시에 부여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김정환(金政煥) 작가는 서울 출생으로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회화전공을 졸업하고 한양대 미술교육학 석사를 취득했다.

2008년부터 2025년까지 총 14회의 개인전을 개최하였으며, 대표적인 전시로는 2024년 오포미술관에서의 《자기만의 침묵 My own Silence》, 2018년 일본 고베 갤러리 기타노자카에서의 《묵음 Poetry with Silence》, 2016년 백악미술관에서의 《묵음》 등이 있다. 특히 2018년 일본 전시에서는 현지 평론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전 이타미 시립미술관 관장인 사카우에 요시타로로부터 "매재의 성질을 그대로 살려 마음의 깊이와 기품 등을 증폭시키고 있다"라는 찬사를 받았다.

주요 단체전으로는 2024년 '삶의 경계에서-한일작가전'(인사아트센터), Art Vancouver 2024, 서울시 서예대전 초대작가전, 한일 현대미술 동행전 등 약 95여 회에 참여한 바 있다. 이러한 활발한 전시 활동을 통해 국내외에서 그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인정받고 있다.

김정환의 작품은 대유미디어그룹, 아주대학교 다산관, 신촌 세브란스병원, 아시아개발은행, 국가평생교육진흥원, 라마다호텔 남대문, 한국예탁결제원, 전북대학교, 육군본부, 중국 달관 미술관 등 다양한 기관에서 소장하고 있어 그의 작품성을 입증한다.